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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천재, 허균
이 름 Oliver  
날 짜 2014-01-05 17:3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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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許筠, 1569~1618] 박학다식한 지식인이자 정치 반항아

명가의 후예, 자유분방한 삶

허균이 속했던 집안은 당대 최고 명가의 하나였다. 

부친 허엽은 호가 초당(草堂)으로, 오늘날 유명한 강릉 초당두부의 그 초당이다. 허엽이 초당을 호로 한 것은 그의 처가와 관련된다. 즉 허엽의 두 번째 부인인 강릉김씨 김광철의 딸의 집이 강릉에 있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허균의 이복형 허성은 이조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동복형인 허봉은 유희춘의 문인이며 허균을 가르칠 정도로 학문이 상당히 수준급에 달했던 인물이다. 또한 허균과 동복형제로는 우리에게 여류문인으로 알려진허난설헌이 있다. 부친 허엽은 동인의 영수였고, 형인 허성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뒤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허균의 부친인 허엽의 사망 사실을 전하는 기록에서는 허균이 속한 집안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세 아들인 성(筬)·봉(篈)·균(筠)과 사위인 우성전(禹性傳)·김성립(金誠立)은 모두 문사로 조정에 올라 논의하여 서로의 수준을 높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컫기를 ‘허씨(許氏)가 당파의 가문 중에 가장 치성하다.’고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012.4.28 좋은 봄날씨, 허균과 그의 가족의 자취를 보러 강릉초당으로 떠났다.
허균과 허난설헌의 시비를 보고 기념공원으로 가려는데 동네입구에 아담한 시비가 보이기에 내려보니 허균의 아버지 초당 허엽의 시비였다.



허균의 父 허엽 [許曄, 1517~1580] 선생 시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양천(). 자 태휘(). 호 초당().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대사간에 올라 향약의 시행을 건의하였으며 동인 ·서인의 당쟁 시 동인의 영수가 되었다. 30년간 관직 생활을 하였으나, 청렴결백하여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장남 성과 차남 봉, 삼남 균, 딸 난설헌과 함께 중국 ·일본에도 잘 알려져 있다. 저서에 《초당집》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등이 있다.
초당동 입구에 있는 허균과 허난설헌의 시비

왼쪽 허균의 시비에는 그의 시 "사촌에 이르다' 오른쪽 허난설헌의 시비에는 '꿈속에 노닐던 광상산의 시'가

새겨져 있다.

허씨 5문장(五文章) ~ 허균의 아버지 초당 허엽을 비롯한 누이 난설헌과 허균의 삼형제를 일컽는다.

(아버지, 초당 허 엽. 첫째, 악록 허 성. 둘째, 하곡 허 봉. 누이, 난설헌 허초희. 세째, 교산 허 균)



기념공원에는 허씨 오문장의 대표적인 시가 새겨진 시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

허균은 당대 명가의 후예로, 자유분방한 삶과 파격적인 학문을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굴곡있는 삶을 살았던 정치인이자, 자기 꿈의 실현을 바라던 호민을 그리워하던 사상가였다.

허균은 분명 시대의 이단아였다.

허균생가터에 있는 교산시비(강릉시사천면, 자료사진)

허균의 호 가운데 하나가 교산(蛟山)이다. 교산에서 교(蛟)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말한다.

허균의 호인 교산은 그가 태어난 강릉의 사천진해수욕장 앞에 있는 야트막한 산을 말한다. 산의 형상이 꾸불꾸불해서 붙여진 명칭이었다. 허균은 홍길동전과 같은 꿈을 꾸었는지 모르지만 끝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로 끝나고 만 것은 아닐까?



허균, 허난설헌의 기념관. 두 오누이의 여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러 해 연이어 중국 가는 길 비록 힘들지만/ 옛사람 책 많이 얻어 오는 즐거움 있네/

가진 것 죄다 털어 책 산다고 비웃지 마오/ 나는 장차 책벌레가 되려고 하니'
허균이1616년 1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북경에서 쓴 시의 한 구절이다. 독서가로 소문난 허균은 1616년에만 은(銀) 1만5000냥을 들여 책 4000권을 사들였다고 알려져있다.

그의 생활은 매우 자유분방했던 듯하다.

허균은 평소 “참선하고 부처에게 절할 정도”로 불교에 대해서 호의적이어서 여러 명의 승려들과 교류하였으며, 신분적 한계로 인해 불운한 삶을 살고 있던 서자들과도 교류하였다. 또한 요즈음 같으면 지탄받을 일이지만, 기생과 정신적인 교감을 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생활을 하였다.

한 번은 그가 아끼던 부안의 기생 계생이 죽자, “신묘한 글귀는 비단을 펼쳐 놓은 듯(妙句堪擒錦)/ 청아한 노래는 가는 바람 멈추어라(淸歌解駐雲)/ 복숭아를 딴 죄로 인간에 귀양 왔고(偸桃來下界)/ 선약을 훔쳤던가 이승을 떠나다니(竊藥去人群)…”라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계생은 유명한 부안 기생 매창의 다른 이름이다. 여기서 “남녀간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며, 남녀유별의 윤리는 성인의 가르침이다.

성인은 하늘보다 한 등급 아래다. 성인을 따르느라 하늘을 어길 수는 없다”고 한 허균의 발언의 통해서 그의 생활 태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같은 허균의 생활 태도는 학문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글쓰는 재주가 매우 뛰어나 수천 마디의 말을 붓만 들면 써 내려 갔다. 그러나 허위적인 책을 만들기 좋아하여 산수나 도참설과 도교나 불교의 신기한 행적으로부터 모든 것을 거짓으로 지어냈다”([광해군일기])고 평가되었다. 그의 행동과 학문은 분명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옆의 소나무숲

정치적 굴곡의 삶

허균의 관직 생활은 선조 27년(1594) 과거 급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사관직인 검열을 비롯해 세자시강원설서등을 지내다가 황해도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파직되었다. 서울의 기생을 데리고 와서 살고, 자기를 시종하는 무리들을 거느리고 와서는 거침없이 행동하면서 청탁을 일삼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밖에도 그는 불교를 숭상한다는 이유로 몇 차례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기도 하였다.

허균의 정치적 생애는 광해군 5년(1613) 이른바 “칠서지옥(七庶之獄)”으로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칠서지옥이란, 영의정 박순의 서자 박응서, 목사 서익의 서자 서양갑 등 7명의 서자가 주도한 변란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옥사를 말한다. 7명의 서자 가운데 심우영은 허균의 제자이기도 할 정도로 허균은 평소 이들과 친분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허균도 이 일로 인해 혹시 모를 불상사를 당할 수도 있었다. 물론 이 옥사에서 허균의 관련성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허균의 입장에서 자신을 뒷받침해줄 든든한 후원군이 필요하게 되었다.

결국 허균은 당시 실력자 이이첨에게 자신을 의탁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는 옥사에서 일단 화를 피하는데 그치지 않고 호조참의와 형조판서 등을 지내는 등 정권과 밀착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정치적 무리수를 감행하였다. 바로 대북세력의 전면에 나서서 인목대비의 폐비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었다. 인목대비의 폐비 문제는 칠서지옥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같은 북인세력인 정온을 비롯해 남인계 이원익 등 상당수의 신료들이 반대하였던 사안이었다, 허균과 함께 정치적 동지였던 영의정 기자헌 역시 반대하였다. 그러나 허균은 인목대비의 죄를 언급하는 것은 물론이요, 영창대군은 선조의 아들이 아니고 민가(民家) 사람의 아이를 데려다가 기른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인목대비는 폐위되어 서궁(西宮)에 유폐되었지만, 허균은 이 일로 폐비를 반대하는 상당수 여론으로부터 배격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동지였던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으로부터 역모 혐의로 고발되기에 이르렀고 끝내는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세상의 맛은 늘그막에 쓰고/ 사람의 마음은 마지막이 어렵지/

문학도 벼슬도 모두 다 누리려다/ 한순간에 끝날 줄 그 누가 알까'

1616년 북경에서 쓴 시가 화근이 됐을까. 2년 후, 그는 이 시구대로 역모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장에서 능지처참으로 세상을 마감했다.

(능지처참 [陵遲處斬] : 대역죄나 패륜을 저지른 죄인 등에게 가해진 극형이다. 언덕을 천천히 오르내리듯[] 고통을 서서히 최대한으로 느끼면서 죽어가도록 하는 잔혹한 사형으로서 대개 팔다리와 어깨, 가슴 등을 잘라내고 마지막에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어 죽였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산면 맹리의 양천 허씨 가족묘

묘역 앞에 세워진 천봉비(薦奉碑)를 보면 1967년 7월 12일 당시 영등포구 서초동과 성동구 언주출장소(지금의 강남구) 지역에 산재되어 있던 묘소들이 경부고속도로 공사구간에 편입되어 이장되어 온 것이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허균의 묘는 애초부터 시신이 없었던 가묘(假墓)로 관리되어왔다고 전해진다.

“대저 이루어진 것만을 함께 즐거워하느라,

항상 눈앞의 일들에 얽매이고, 그냥 따라서 법이나 지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이란 항민(恒民)이다.

항민이란 두렵지 않다.

모질게 빼앗겨서, 살이 벗겨지고 뼈골이 부서지며, 집안의 수입과 땅의 소출을 다 바쳐서, 한없는 요구에 제공하느라 시름하고 탄식하면서 그들의 윗사람을 탓하는 사람들이란 원민(怨民)이다.

원민도 결코 두렵지 않다.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천지간(天地間)을 흘겨보다가 혹시 시대적인 변고라도 있다면 자기의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란 호민(豪民)이다.

대저 호민이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다”

([성소소부고]권11, ‘호민론’)

허균의 호민론 일부. 허균은 ‘호민론’을 통해 위정자들에게 경고하면서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런 그의 사고가 결국 [홍길동전]을 통해서 보다 구체화되었다고 하겠다.


홍길동전(洪吉童傳) : 허균의 꿈

구소설(舊小說). 한글로 씌어진 소설의 효시이며, 한국 근대소설의 선구적 작품.

정치가 부패하고 적서(摘庶)의 차별이 심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비판하여 봉건적 가족 관계와 사회 제도에 대한 저항을 시도한 일종의 사회소설이요, 혁명소설로서 명대(明代) 소설, 특히 《수호전(水滸傳)》의 영향을 받은 작품인 듯하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세종 때 홍정승과 시비(侍婢) 사이에 태어난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학대 속에 자란다. 그는 총명한 재주에 학식이 뛰어나 호풍환우(呼風喚雨)하는 법과 둔갑술을 알고 있었으나 집안 사람들의 멸시를 참지 못하여 만강의 불평을 품고 집을 나온다. 활빈당(活貧黨)이라는 적당의 수령이 되어 지방부호와 탐관오리의 불의의 재물을 탈취하여 빈민을 구제함으로써 모순된 사회제도에 대한 분풀이를 한다.

이와 같이 팔도(八道) 각처에 임의로 출몰하여 지방인심을 소란케 하니, 정부는 이를 우려하여 그를 잡으려고 백방으로 힘을 쓰나 잡히지 않는다. 길동은 오히려 병조판서의 교지(敎旨)를 내리면 잡히겠다는 방을 써서 4대문에 붙여 관가를 희롱한다. 하루는 길동이 공중에서 내려와 스스로 잡히기를 자청, 결박당했다가 철삭을 끊고 사라져 버린다.
이에 놀란 왕이 병조판서를 주겠다는 방을 붙이니 길동이 사모관대하고 초헌(超軒)을 타고 대궐안에 들어와, 평생의 한을 풀어 준 천은(天恩)에 감사하고, 공중으로 사라진다. 비로소 왕은 그 기이한 재주에 감복하여 길동 잡기를 단념한다. 그후 길동은 왕에게 하직하고 부하를 데리고 율도국으로 건너가 그 국왕이 되어 이상향(理想鄕)을 건설한다.

소설 홍길동전, 오죽헌박물관 홍길동 상, 경포호반

유몽인은 "역적 허균은 총명하고 재기가 뛰어났다." 고 평가했다.

그가 지은 소설 홍길동전은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허균이 진보적인 종교인이어서, 천시 받던 불교는 물론 천주교까지 신봉하였다는 평가도 있고 한편 기인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문집에 실려 있는 그의 한시는 많지는 않지만 국내외로부터 품격이 높고 시어가 정교하다는 평을 받는다.

시화(詩話)에 실려 있는 그의 문학비평은 당대에는 물론 현재에도 문학에 대한 안목을 인정받고 있다.

그의 사상은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대역죄에 해당되어 허균은 1618년 능지처참이라는 극형을 받고 연좌제가 적용되어 강릉에 있는 아버지 허엽의 묘소도 부관참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허균의 집안은 기울어지고 흩어진 것으로 보인다.1623년 인조반정 이후에도 그가 북인과 대북당원이었던 탓에 복권되지 못하고 결국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유일하게 복권되지 못한 인물로 남았다.

(조선 제1호 대역죄인이던 정도전은 1865년 경복궁 중건시 흥선대원군으로 부터 복권되었다.)

허균, 최고의 글쟁이인가… 경박한 욕망가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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